나는 당초 『러시아 문학기행』 1권과 2권을 함께 출간하려고 했다. 2020년 4월 경 러시아를 한 차례 더 다녀온 후 2권을 마무리 지으려고 계획을 했었다.그런데 2020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번엔 스타라야루사를 좀 여유있게 다시 돌아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죄와 벌』 관련 구역도 찬찬히 다시 살펴본 후, 그곳의 러시아 미술관과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에도 가 보려고 했다.또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초상화와 러시아의 최고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트레티야코프 미술
당시 소련은 모두에게 낯설고 불편했다. 통역 문제 또한 그래서 빚어진 일이다. 신씨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정상외교의 현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그런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지나쳤다고 할 수 밖에 없다.나와 남찬순 기자가 그 자리에 풀 기자로 가지 않고 내가 신씨가 경호관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다가가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그 기사는 안 나왔을 것이다.우리가 그 기사를 쓰기로 결정했을 때 출입 기자들 중에는 한국 대통령의 첫 소련 방문인데 그런 해프닝을 굳이 기사로 쓸 필요가 있겠냐고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
지금은 러시아어를 잘하는 사람이 국내에 많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구나 정상회담의 통역을 할 정도의 러시아어 능력과 소련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을 국내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그래서 재미동포 중에서 여성 러시아 학자 한 분을 통역으로 영입했는데 이 분은 자존심이 무척 센 분이었다. 공식 만찬장에서의 통역 퇴장 사건은 노 대통령이 그 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바람에 발생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사건은 방문 둘째 날인 12월 14일 저녁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 주최의 노태우 대통령 내외
한-소 수교 후 석 달 만에 이뤄진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은 사실 두 나라 간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서막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도착 다음날인 12월 14일 모스크바 대학에서 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그 내용은 그때로부터 45년 전인 1945년 미국, 영국, 소련 등 세 강대국에 의해 신탁통치 논의 대상이 되었던 나라가 이제는 소련을 돕는 입장으로 바뀌어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을 소련에 이야기하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담긴 연설이었다.19세기 러시아의 저명한 문인 곤차로프(이반 알렉산드로
지금은 러시아지만 그때는 소련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와 러시아 두 나라가 수교하던 해인 1990년 당시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체제였다. 따라서 한국과 소련간의 수교였다. 2021년이 됐으니 한-러 수교도 벌써 31년이 된다우리나라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조선말기인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에서 시작되었지만, 일본의 승리로 끝난 러일전쟁(1904~1905)의 와중에 파기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일본의 강압으로 대한제국은 러시아와의 국교관계를 단절한다. 1990년 한-소 수교 당시 정부가 ‘실로 86년만의 양국 외교관계의
노보시비르스크의 도스토옙스키와 푸시킨의 동상을 찾아보고 귀국하던 같은 날인 2017년 10월 7일 저녁 6시, 나는 김준길 교수와 과거 방송사 시절 인연이 있었던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 극장을 방문했다. 타치아나 기네비치 부극장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극장장은 부재중이었다.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발레 극장은 내게 특별한 기억이 있는 곳이다. 나는 2007년과 2008년 두 차례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발레단의 내한 공연 교섭차 노보시비르스크에 갔었다.두 번째인 2008년 12월 방문 때는 나와 동행했던 안지환 그랜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1917년 3백년 만에 막을 내린 제정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엄청난 유럽식 개혁을 추진했고 유럽에 다가가기 위해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기까지 했다.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해에 면한 네바강 하구에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도록 명령하자 많은 세습귀족들이 반발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자기가 마음먹은 일을 철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천도를 강하게 밀어붙여 1713년 마침내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이전했다.
러시아의 역사를 보면 잘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 자기가 너무 잘났기 때문에 아들이 시원치 않아 보이는 모양이다. 조선시대에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아무 견제 장치도 없는 전제체제에서는 설령 자식이라고 하여도 군주에게 잘못 보이면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 주위에 그 자식을 변호해줄 사람도 없다. 누가 절대권력자인 황제에게 싫은 소리를 하겠는가?이 책 제15부 [작가노트2]에서 도스토옙스키 초상화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 크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갔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쇠지팡이로 황태자를 때려죽
『러시아 문학기행1』, 제4부에 도스토옙스키가 첫 사랑의 여인 마리야를 만나기 위해 시베리아 세미팔라틴스크(현재 이름은 세메이)에서 즈미예브(현재 이름은 즈메이노고르스크)까지 갔다가 ‘300km의 거리를 마차를 달려 28시간 만에 돌아왔다’는 얘기를 했다. 그것은 마차를 타고 함께 갔던 브란겔 남작의 회고록에 나와 있는 것이다. 마차로 하루 250km 이상을 달렸다는 것이니 대단한 기록이다.어떤 종류의 마차인지는 알 수 없다. 마차도 말 한 필만 달린 마차, 쌍두마차, 사두마차, 육두마차 등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사병으로 강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가기 위해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한 2017년 10월 4일. 이날 저녁은 뿌뻰하우스라는 노보시비르스크 시내의 오래된 인형극장식당에서 내가 이번 여행에 동행할 동포 김준길 교수 가족(김 교수, 부인 나탈리아 이남순 씨, 딸 나니)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했다.식사를 천천히 한 후 나탈리아의 차를 타고 노보시비르스크역으로 갔다. 개찰구가 열리는 시간까지 구내 커피숍 비슷한 곳에서 잠시 기다렸다. 30분 전에 개찰구가 열려 김 교수와 같이 열차에 올랐다.노보시비르스크와 옴스크 사이는
러시아의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 숨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도 푸시킨 문학 박물관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Q: 푸시킨 박물관이 된 푸시킨의 마지막 아파트는 옛 황궁인 에르미타주 박물관 근처라지요?푸시킨이 최후를 맞은 푸시킨 집은 황제의 겨울궁전(현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반지하층을 포함해 4층짜리 건물입니다. 노란색 아파트 앞으로는 운하가 흐르고 있고 박물관은 집안의 정원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푸시킨의 집이 황제의 궁전 가까이에 있는 이유는 그가 1834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다운 운하의 도시다. 표트르 대제(1672~1725)때 발틱해와 접하는 네바강 하구에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1703년부터 도시 건설을 시작해 10년 후인 1713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볼셰비키 혁명 다음해인 1918년 모스크바가 다시 수도가 되기까지 200년 이상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다.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국민시인 푸시킨과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활동한 곳이며 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출생지는 모두 모스크바다.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둔 상트페테르
Q: ‘러시아~’하면 영화 ‘닥터 지바고’가 먼저 떠오른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파스테르나크가 『닥터 지바고』를 집필한 페레델키노는 어떤 곳인가요?러시아 문학기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가 살았던 페레델키노입니다. 이곳은 모스크바 인근의 작가촌입니다. 작가들이 모여살던 곳이지요.그가 살던 집은 별장같은 외관의 아담한 이층입니다. 별장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곳에서 『닥터 지바고』를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 여기서 생을 마감했습니다.마당에는 작은 과수밭이 있
Q: 두 번째 일정은 멜리호보에 있는 극작가 겸 단편작가 안톤 체호프의 집인데, 이곳은 영지라고 부르지 않나요?안톤 체호프(1860~1904)는 귀족이 아니었습니다. 농노의 후손이었습니다. 귀족들의 땅은 보통 영지라고 하지만, 체호프가 살았던 멜리호보의 경우는 그렇게 부르지는 않습니다.체호프가 그 땅을 산 것은 1891년입니다. 서른살 때인 1890년, 시베리아를 거쳐 사할린섬에 다녀오는 대모험을 단행한 후 그동안 원고를 써서 모은 돈으로 모스크바에서 어렵게 살던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 사들인 가옥이 딸린 제법 큰 땅입니다.체호프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러시아 문학기행을 꿈꾼다. 러시아 문학기행은 대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짜여지는데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체호프, 파스테르나크 등 러시아 문호들의 작품의 현장과 자취를 찾아보는 일정으로 기획된다.또한 세계적인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아름다운 분수로 유명한 여름궁전 또는 호박방으로 이름난 예카테리나 궁전 등도 둘러본다.몇 차례 그같은 여행에 참여하고 때론 해설도 했던 경험으로 러시아 문학기행과 관련
아버지의 전기를 쓰기도 한 딸 류보피(1869~1926)는 1913년부터 해외에 거주했는데 1926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했던 아들 표도르(1871~1922)는 말 사육전문가로 살다가 류보피보다 먼저 1922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던 도스토옙스키의 아들 표도르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는 일찍 죽고 안드레이란 아들만 남았다.그러니까 안드레이는 도스토옙스키의 하나 뿐인 친손자다. 안드레이는 산림관리기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탱크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그는 생전에 레닌그라드(
그러면 도스토옙스키는 살아 생전에 스트라호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심리분석의 대가인 도스토옙스키가 스트라호프의 본심을 꿰뚫어보지 못했을까? 도스토옙스키도 실은 스트라호프의 태도를 의심했다.도스토옙스키는 죽기 7년 전인 1874년 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요즘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그는 추악한 신학생일 뿐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오. 그는 내 인생에서 나를 한번 버렸었고, 그러니까 가 실패했을 때 말이오. 『죄와 벌』이 성공한 후에야 돌아왔소”라고 썼었다.도스토옙스키의 편지에서 보
스트라호프의 편지를 읽고 나는 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10년 넘게 우리 가족을 찾아왔던 사람이, 남편으로부터 그토록 따듯한 대접을 받았던 사람이 거짓말쟁이였다니! 그런 더러운 중상모략을 남편에게 뒤집어 씌우다니! 그런 저질스런 인간에게 남편과 내가 속았던 것을 생각하니, 그를 신뢰했던 것을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나는 스트라호프가 편지에서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끓어오르는 혐오감과 싸웠다”고 한 것에 놀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리고 자신이 쓰기로 한 전기의 대상인 그 사람을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지 어느새 32년이 지난 1913년 가을, 이미 67세 할머니가 된 안나는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스트라호프(1828~1896, 평론가)의 편지를 읽어보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안나는 스트라호프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죽는 날까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 중 하나로 남편의 공식 전기까지 자진해 쓴 사람이므로 그가 쓴 편지라면 모두 좋은 이야기들이겠거니 생각하고는 “아직 못 읽어 보았다”고 대답한 후 한동안 잊고 지냈다.그러다가 이듬해인 1914년 여름, 안나는 모스크바의 ‘도스토옙스키 기념 박물관’이 보완을 위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1881년 1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쿠즈네치느이 길 5번지 아파트의 살림집은 지금 박물관이 되어 방문객을 맞고 있다.아파트 박물관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금빛 돔을 가진 러시아 정교회의 블라지미르 성당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가족이 다니던 성당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숨을 거두기 전에 받은 종부성사도 이 성당의 사제가 와서 했다.성당 가까운 곳에는 아담한 도스토옙스키 동상이 있는데 모스크바 레닌국립박물관 앞이나 스타라야루사의 동상처럼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앉아있는 자세다. 도스토옙스키 동상의 모양은 어디